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민정음 해례본 (문단 편집) ==== 안동본 발견의 뒷이야기 ====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external/img.khan.co.kr/84_a.jpg|width=100%]]}}} || || [[김태준(1905)|김태준]](金台俊, 1905 ~ 1949) ||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이용준(훈민정음).png|width=100%]]}}} || ||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aver?articleId=1930110800209205022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30-11-08&officeId=00020&pageNo=5&printNo=3541&publishType=00020|1930년 11월 8일 동아일보]]에 실린 이용준의 15세 (추정) 시절 사진[* 얼굴에 있는 흠은 마멸된 것으로 보인다.] || 안동본은 일제강점기의 국문학자 김태준의 제자였던 서주 (西州) 이용준(李容準; 1916년 3월 3일 출생)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밝혀졌다. 당시 김태준은 [[성균관대학교|경학원]](성균관대학교의 전신)과 [[경성제국대학]]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하고 있었다. 그리고 김태준의 제자 이용준이 자신의 처가[* 이용준은 긍구당 종택 12대 종손 [[김응수(1880)|김응수]]의 셋째 딸과 결혼했다.]인 [[안동시]] [[와룡면]] 가야리 [[광산 김씨]] [[https://terms.naver.com/entry.naver?cid=40942&docId=1201323&categoryId=33383|긍구당]](肯構堂) 종택[* 조선 중기의 학자 [[https://terms.naver.com/entry.naver?cid=46649&docId=552767&categoryId=46649|유일재 김언기]](惟一齋 金彦璣; 1520년 8월 26일 – 1588년 3원 15일)가 말년에 살았던 집으로, 본래는 [[이(성씨)|영천 이씨]] (永川 李氏) 참봉공 (參奉公) 종택이었다고 한다. 김언기는 첫째 부인 [[영양 남씨]](1522년 – 1555년 12월 6일) 남세용(南世容)의 딸과 1555년 사별한 뒤, 영천 이씨 (1540년 – 1599년 8월 17일) [[참봉]] 이인필(李仁弼)의 딸과 재혼하여 30대 후반부터는 처가인 이곳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. 그 뒤 이 집은 둘째 부인 영천 이씨 슬하에서 태어난 차남 김득숙(金得䃤; 1561년 – 1649년 4월 26일)이 물려받았으며, 지금의 당호는 김언기의 현손 김세환(金世煥; 1640년 – 1703년 2월 14일)의 호를 딴 것이다.]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발견하고는 스승 김태준에게 알렸던 것이다. 당연히 김태준은 깜짝 놀라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⟪해례본⟫을 직접 확인했다. 이용준은 잘 보관할 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고 말했고,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간송 [[전형필]]을 떠올렸다. 김태준은 전형필을 만나 ⟪해례본⟫ 이야기를 했고,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 1천 원을 찾아와 1천 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 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렀다.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,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'''30억 원'''에 해당되는 금액이다. 당시 전형필이 ⟪해례본⟫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. 앞서 ⟪해례본⟫의 앞쪽 두 장이 찢겨나갔다고 언급했는데, 2000년대의 연구에 따르면 [[일제강점기]]에 ⟪훈민정음 해례본⟫이 공개되었을 때 그에 관련되어 있던 인물들이 소유주 몰래 팔아먹기 위해(!) 일부러 찢어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. (박종덕(2006년) - 훈민정음해례본의 유출에 대한 연구 《한국어학》 31호, 김주원(2005년) - 훈민정음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《국어학》 45호.) 이 안동본의 원 소장자과 매각 과정에 대해서는 1950년대 [[안동고등학교]] 국어 교사로 있던 정철이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 알려졌는데, 당시엔 정철이 원 소장자를 [[경상북도]] [[안동시]] [[진성 이씨]] 가문의 후촌 (後村) 이한걸(李漢杰; 1880년 – 195년 4월 10일)로 [[https://www.khan.co.kr/culture/culture-general/article/202208070800001|소개했으므로]] 이한걸의 셋째 아들인 이용준이 자신의 고향 집에서 "⟪훈민정음⟫"으로 발견한 것으로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왔다. 그러나 사실은 이용준이 긍구당의 서고를 열람하다 ⟪해례본⟫을 '''훔쳐갔던''' 것. 이용준이 ⟪해례본⟫과 ⟪[[https://terms.naver.com/entry.naver?cid=46644&docId=545576&categoryId=46644|매월당집]]⟫을 여기서 훔쳤는데 표지에 광산 김씨 가보를 뜻하는 도장이 찍혀있어 이를 찢어내어 팔았던 것이 표지 실종의 진실이었던 것이다. 즉 본 문서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연산군의 한글 탄압과는 무관하다. 현재 일본에 있는 ⟪매월당집⟫ 역시 ⟪해례본⟫과 마찬가지로 앞 두 장이 인위적으로 찢겨 있다. [[http://www.jabo.co.kr/sub_read.html?uid=15655|나중에 이를 들키고 장인에게 혼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도 있다]]. 그 이후 김태준과 이용준은 이걸 판 돈을 [[사회주의]] 운동에 써 [[경성 콤그룹]]의 거물이 되었다고 한다. 김태준은 지리산 [[빨치산]]으로 붙잡혀 죽었으며, 이용준은 월북했다고 전해진다. '''하지만''' 이들의 이후 공산주의 행적은 따로 평가하더라도 영원히 묻혀 버릴 뻔했던 ⟪해례본⟫을 공개한 공적은 인정해야 한다. 소유주인 [[광산 김씨]] 문중에서는 애초에 이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으면서 후일의 인터뷰에서는 빼앗겨서 억울하다고 소유권을 주장했다. 이들이 아니었다면 ⟪해례본⟫은 지금도 종택 서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거나 6.25 전쟁 중 없어져 버렸거나 했을 것이다. 실제로 소유권을 주장한 광산 김씨 종택과 그들의 의뢰를 받아 해례본이 광산 김씨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종택에 이것만큼 귀한 책들이 몇 권 더 있다고 주장했으나 10년이 넘도록 아무 소식도 없다. 결국 이용준, 김태준이 아니었으면 ⟪해례본⟫은 공개되지 않았을 것이다. 또한 정 억울하면 광산 김씨 문중이 간송미술관에, 소유권에 기(基)한 소유물 반환소송을 걸면 되는데, 그러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입수 경로를 확실히는 말하지 못하는 듯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